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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名匠)을 찾아서...① 대한민국명장회 김영모 회장 작성일 : 11-10-27 16:42
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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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으로 우리나라 최고 ‘부촌’ 사로잡은 남자


명장(名匠)을 찾아서...① 대한민국명장회 김영모 회장


시민리포터 이상무 | 2011.07.07




 










‘명장’은 기술이 뛰어나 이름난 장인을 말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각 분야별로 1년에 1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최고의 타이틀이다. 공예, 섬유, 기계, 건축, 서비스 등의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을 가진 위대한 이들을 만나본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사)대한민국명장회 사무실. 탄탄한 체구에 눈썹이 짙고 굵은 호남형의 남자가 리포터를 반긴다. 그는 바로 빵맛 좋기로 유명한 ‘김영모 과자점’의 김영모 사장이다. 2007년에 제과명장으로 선정된 그는 지난 3월 대한민국명장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해 활동 중이다. 현재 서초본점, 도곡타워점 등 4개 매장, 직원 180명, 연매출 120억 원에 이르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사업체를 꾸리고 있지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부모의 이혼으로 이모, 고모, 작은아버지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소년이 된 김영모는 어느날 엄마를 찾아가지만 자신을 뿌리치고 뒤돌아서는 엄마의 뒷모습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때 그는 꼭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빵가게 보조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운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최고의 부촌 ‘타워팰리스’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과자점이니 가격이 꽤 비쌀 것 같습니다?
“적정 이윤을 계산해 값을 정하기 때문에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돈벌려고 사업해 본 적 없습니다. 돈이 먼저였다면 아마 지금의 저도 없을 겁니다. 당장의 이윤에 급급한 게 아니라 100년 기업, 1000년 기업으로 이어갈 꿈을 꾸기 때문에 돈을 쫓진 않습니다.”


 


- 매장이 여러 곳인데 운영은 누가 합니까?
“우리는 프랜차이즈는 하지 않습니다. 네 개 매장 중 두 군데는 함께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이 소사장 제도로 운영합니다. 매장 하나 내는 데에 10억 이상이 필요한데 본인에게 20% 정도 부담시켜 책임감을 갖도록 합니다. 빵가게는 집사람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집사람은 포장과 디스플레이 전문가죠. 장남도 경영관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학력이 고등학교 1년 중퇴인데 학력콤플렉스는 없습니까?
“아뇨. 콤플렉스는 없습니다. 부족하면 항상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동네 스포츠센터 동호회 회원 50명과 자리를 함께 했는데, 저를 뺀 나머지 49명이 모두 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했죠. ‘나는 고등학교 3개월 밖에 못 다녔지만 시사나 상식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요. 그랬더니 모두 박수를 치면서 저에게 술을 한 잔씩 권하더군요. 그날 소주 49잔 마시고 아주 고생했습니다.”


김 회장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인생 역전의 기회로 삼았다. 학력 부족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를 보며 ‘승리는 가장 끈기 있게 노력한 사람에게 간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떠올랐다.


2007프랑스리옹


 


- 외국 연수도 자주 다녔다고 들었어요.
“어학을 못해 해외 연수를 가서 비용은 몇 배 들이고 정보는 1/10 밖에 얻지 못했어요. 그래도 최고 기능인이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영국, 독일에 나갔어요. 이제는 어학이 경쟁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시킵니다. 시험은 못 봐도 나무라지 않지만 거짓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어긴다거나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외교사들이 3개월을 버티지 못했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공부를 가르친 후에 질문을 하면 가르친 대로 말하지 않고 엉뚱한 답을 하여 맥이 빠져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 부모 입장에서 속상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아이에게 공부가 싫으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책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며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빵을 만들겠다고 하더라고요. 억지로 공부를 시키면 아이가 이상해질 것 같아 적성을 살려주었지요. 중2 때부터 영국, 프랑스에 있는 제과전문기술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국제기능올림픽 제과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동메달을 땄습니다. 영어, 불어를 잘 해 국제기능올림픽 청소년포럼 시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 아버지가 공부도 많이 하고 멋쟁이였다고 하던데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서울신문사 광주주재 기자였지요. 가까운 동네에 나갈 때도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어야 하는 한량이셨어요. 어머니께 생활비도 주지 않고 가정적이지도 못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못해 서로 맞지 않았나 봐요. 제가 돌이 지나자마자 두 분은 이혼을 하셨고 어머니는 3살 위인 형만 데리고 개가를 하셨지요. 나는 이모, 고모, 작은어머니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습니다.”


 


- 친엄마는 왜 자식을 냉정하게 뿌리쳤습니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자식이 하나뿐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엄마가 냉정하게 뿌리친 게 오히려 나에게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대구에 있는 구일제과에서 숙식을 하며 빵 기술을 배웠습니다.”


김영모


 


-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가 가장 외로웠습니까?
“ 부모 형제 하나 없이 명절이면 갈 데가 없어 혼자 연탄불 꺼진 공장에서 외로움을 달랠 때죠.”


 


- 소년원에 들어간 적도 있다면서요?
“허허.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일하다보니 억양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싸워서 이겨야만 놀림을 안 받을 수 있기에 독해질 수밖에요. 그 당시 별명이 독사, 짱돌이었어요. 같은 직장 동료와 술 마시고 싸워 이를 3개나 부러뜨렸어요. 소년원에 들어가 보니 두 번 다시는 올 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도 넘겼다고 들었어요.
“외롭고 쓸쓸해서 술 담배를 일찍 배웠어요.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 보니 폐결핵이 생겨 직장(구일제과)에서 쫓겨났지요. 갈 데는 없고 친어머니께 다시 연락을 했어요. 내가 죽게 생겼다고요. 어머니가 구미에 있는 절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요.”


 


- 인생의 지침은 어디서 찾습니까?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했는데 병과는 운전병이었으나 글씨를 잘 써 행정근무를 했습니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던 앞 뒤 표지가 다 떨어진 책에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의 상황과 너무도 비슷하여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을 새롭게 잡고 그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 당시 그 책은 데일 카네기의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인 듯합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비슷한 내용이 있더군요.”


 


- 부모형제 아무도 의지 할 데가 없었는데 제대 후 뭘 했습니까?
“먹고 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빵 기술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보초 근무 시에도 한 손에 돌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싸릿대를 잡고 손목 놀림을 연습을 했어요. 제대 후 삼선교 나폴레옹제과와 무교동 보리수제과점에서 일하다가 친구 소개로 안동 출신 아내를 만났습니다.”


 


- <빵굽는 CEO>자서전을 20쇄도 넘게 찍었는데 인세수입도 많겠습니다.
“인세수입과 강사수입은 전액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돈을 벌면 봉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홍은동 무의탁결핵 수용소는 20년, 서초구 다니엘 장애인 학교는 15년 동안 봉사를 했습니다. 요즈음은 도곡동 한아름 사회복지관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명장회- 대한민국명장 회장 선거 시 명장학교를 세우겠다고 공약을 했다던데요?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입니다. 이공계가 요즘 어렵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이 놀면서 일을 안 하려고 해요.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명장들이 가르치고 기술을 대물림해야 합니다. 현재 경운동 협회에 있는 전시장도 청계로 센트리호텔 로비 뒤편으로 옮겨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관광코스로 만들 것입니다.”


 


- 명장들의 경제 사정은 어떤지요?
“명장회가 조직된 지 18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명장회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명장을 공예, 산업, 서비스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공예부분은 대량생산체계가 안 되어 있어 단가가 비쌉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가격만 따지면 우리의 전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김영모 회장은 못 배웠기 때문에 더 배우려고 더욱 노력하였다.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1980년부터 1년에 서너 번씩 해외에 나갔다. 빵의 천국 프랑스는 이미 건강에 좋은 천연발효법으로 빵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법을 안 가르쳐주는 것을 공장 책임자에게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방법을 배워 국내에 최초로 천연발효법을 보급하였다. 어렵게 배워왔지만 자신이 가진 기술을 아낌없이 나누고 있는 그다. 서초방송 케이블TV 개국 초에 서초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냐는 앙케이트에서 구민들이 ‘김영모 과자점’을 1위로 꼽은 적도 있다. 남들과 같은 빵이 아니라 건강에 좋은 천연과일 발효법, 유기농 밀가루, 청정 무공해 소금 등으로 입맛이 까다로운 강남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그가 만든 빵에는 명장의 아름다운 열정이 녹아 있어 더욱 깊은 맛이 나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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