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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주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바늘 고수’
명장(明匠)을 찾아서 ...② 양복 명장 골드핸드양복점 백운현 대표
“양복 기술은 세계 최고 인데 수출을 많이 못하고 있어요. 이태리나 프랑스보다 기술면에서 우리가 못 한 게 하나 없거든요. 우리도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어야 합니다.” 백운현 명장은 2007년 고용노동부와 한국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양복명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68년 중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15세 때 생계를 위해 양복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해 1975년엔 스페인에서 개최된 제22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살다보니 기술 하나로 명장의 자리에 오른 백 명장을 양재동에 있는 그의 양복점(골드핸드)에서 만났다. 그는 양복점과 기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옷 주인과 소통이 돼야 좋은 옷이 나옵니다
- 우리나라가 기능올림픽 양복종목에서 12개의 금메달을 땄는데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합니다.
“국제기능올림픽은 21살 이하만 참가 할 수 있는 대회입니다. 명품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경륜도 필요합니다. 이태리는 60세가 넘어야 장인 취급을 받죠. 어린 나이에 금메달만 딴다고 되는게 아니라 기술을 오랫동안 갈고 닦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디자인 개발과 해외 마케팅 투자도 필요하고요.”
- 요즘엔 맞춤양복점 운영이 어렵다고 하던데?
“전과 같이 나에게 딱 맞는 옷을 맞춰 입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비교적 잘 맞는 옷을 사 입는 추세로 가기 때문에 예전처럼 수요가 많지 않아요. 이제 우리 같은 장인들도 시대 흐름에 맞춰 가야하는데 변화가 늦어 요즘 힘들어요.”
- 기술개발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한국인 체형에 맞는 기본 패턴을 제작(신장170~175cm, 가슴둘레 95~100cm)하거나 수작업으로 하던 가봉의 번거로움을 해소시키고, 심지제작과 소매, 패드 달기 등 공정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등 현실에 맞게 기술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 맞춤양복점이 어떻게 변하고 있나요?
“전국적으로 로드샵(기업형 맞춤점)이 1,000개가 넘어요. 양복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게 아니고 돈 있는 사업가들이 여자 매니저를 두고 지점 여러 곳을 운영합니다. 맞춤옷은 가격이 비싸 한번 사면 아주 여러 해 입기 때문에 급속하게 사양길에 들어가고 있어요. 유행이 자주 바뀌므로 맞춤과 기성복을 절충한 50~60만 원 정도의 반맞춤양복(시스템오더방식)을 컴퓨터를 이용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태리 명품인 아르마니, 제니아, 브로오니, 피톤 양복은 기성복과 맞춤 비율을 10~40%정도 접목하여 500~1,500만 원 정도 받습니다. 웬만한 양복 10~30벌 값이죠.”
- 양복점은 몇 시에 문을 여나요?
“예전에는 가게 문을 무조건 일찍 열어야 부지런 하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손님도 없는데 아침 일찍 열 필요가 없다는 거죠. 지금은 오전 10~11시에 열고 저녁 9시에 닫기도 하는데, 압구정동은 밤에 손님이 많아 낮 11시 30분경에 열어 밤 12시에 닫기도 합니다.”
- 옷을 만들면서 애로사항도 많으시겠지요?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가봉, 수정 등 손질을 많이 해야 해요. 맞춤옷이란 게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춰 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만들어지고 나서 어디 한 곳이 어색하거나 하면 정말 난감하기 때문이죠.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던지고 소리 지르고 찢어 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양복명장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옷을 만들 수 없어요.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요.”
- 명장이 만든 양복은 누가 많이 입나요?
“알만한 저명인사들이 옵니다. 이름은 다 밝힐 수 없으나 그 동안 내 손을 거쳐 간 양복이 만 벌이 넘습니다.”
- 43년 간 옷 만드는 일을 하면서 느낀 양복에 대한 철학은?
“옷을 만드는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그 사람의 직업과 체형을 파악해 그 사람과 소통이 되고 혼이 들어간 옷을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 단골손님이 오지만 간혹 손님 중에 무조건 돈만 깎으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땐 정중히 돌려보냅니다.”
- 양복 일은 어떤 동기로 시작했습니까?
“충청남도 공주 유구에서 태어나 8살 때 아버지 고향인 파주로 가 학교를 다녔어요. 그곳에 살면서 15살 중학생 때 이웃집 아저씨를 통해 재단일을 접하게 됐습니다. 어머니가 아저씨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요. 그 당시 파주에 미군부대가 많아 양복점이 잘 됐습니다. 처음엔 바느질은 여자만 하는 줄 알았어요. 6남매의 장남으로서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양복 견습생이 된거지요.”
- 학교를 중퇴했으니 아버지가 원망스러우셨겠네요?
“아버지는 파주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 하다가 병역문제로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당시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죠. 6학년 때 친구들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는데 난 갈 형편이 안 돼 포기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어렵게 돈을 마련해주셔서 간신히 간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 원망은 해 본적 없습니다. 아직 두 분 모두 일산에서 살고 계십니다.”
- 어렸을 때 꿈이 뭐였나요?
“밥 세 그릇으로 여섯 그릇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서 꿈이란 게 있을 수 없어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야 했어요. 6남매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007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갖다드리는 게 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미술을 좋아했고 학교에서 상을 받은 것을 보면 손재주가 있었던 것 같아요.”
-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스승님이 엄격하여 여자는 모르고 일만 했어요. 대림동에 있던 삼영화학에 스승님 심부름으로 양복을 가져다주는 길에 비서실에 근무하던 집사람을 만났죠. 스승님 중매로 결혼했습니다. 그 때 내 나이는 23살이었습니다. 아들 두 명을 낳아 큰 아들은 중국에서 살기 때문에 둘째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양복점에서 하루 종일 아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충돌도 있어요. 대학에서 기계설비를 전공 하였는데 양복 만드는 일에 흥미가 없어 억지로 시키려니 속이 탑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과의 관계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지요.”
- 견습공 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잠은 작업대 위에서 자고, 밥은 직접 해 먹었습니다. 양복 직종은 도제식이어서 중요한 기술은 잘 가르쳐주지 않아요. 어깨너머로 배우고 혼자서 연습을 했지요. 소매나 깃을 다는 기술은 정말 안 가르쳐 줍니다. 처음엔 살아남기 위해 기술을 배웠지만 기능대회 나가려는 꿈을 가지고 나서는 밤새는 줄도 모르고 노력했습니다. 아직도 가위질 때문에 오른쪽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혀있습니다.”
- 월급쟁이 하다가 어떻게 독립했습니까?
“금메달 땄다고 양복 300벌 주문이 들어오고 그 이후 양복점이 잘 돼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도 월급을 4만 원 정도 밖에 안주는 거예요. 내 월급으로 집에 쌀도 사고 생활해야 하는데 월급이 너무 적었어요. 양복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급제로 운영합니다. 스승님과 동업하던 경영자에게 몇 번을 올려 달라 요구하였더니 나가서 개업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1975년에 받은 기능올림픽상금 100만 원으로 1978년 구로구 시흥동에 양복점을 냈습니다. 25살 때였지요. 주문은 많이 들어왔지만 워낙에 서민들 동네여서 비싸게 받을 수 없어 큰돈은 못 벌었습니다.”
정통 기술 전수할 후진 양성하고 싶어...
- 1980년대 TV CF에 출현도 했다던데?
“국제그룹의 원풍모방에서 하는 ‘단골손님에게 킹텍스를 권합니다’라는 카피의 원단 광고에 출연했죠. 당시 CF 반응이 좋으니까 국제그룹 중역들이 용산에 있는 빌딩으로 양복점을 옮기라고 해서 시흥동 가게를 처분했는데 처분하자마자 국제그룹이 부도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그때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에피모라는 기성복 회사에서 패턴실장으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5년간 일했습니다. 그 때 맞춤복과 기성복의 중간 형태인 반맞춤복사업이 전망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99년 IMF때 부도가 났습니다.”
- 자신의 결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집사람은 나보고 냉정하지 못하고 천성이 착해 장사속이 없다고 해요.”
- 전망이 좋은 반맞춤 양복점을 하지 않고 맞춤복점을 고집하는 이유는요?
“5년 전까지만 해도 맞춤양복기술협회에서 시스템오더사업을 하면 가격을 파괴하는 배반자로 낙인찍히고 협회에서 제명을 당했어요. 더구나 나는 메달리스트이고, 명장이 되려고 하는데 업계에서 지탄 받으면 될 수 없기 때문에 못했어요. 2007년 명장이 되고 나서 급속도로 시스템오더 방식이 확장되고 있어요. 지금은 협회에서도 시스템오더 방식을 검토 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5억 이상 시설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 자본이 부족해요.”
- 운이 좋아 훌륭한 인생의 길잡이를 만났다고 하던데요?
“파주에서 이웃집 아저씨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운 좋게 소공동에 있었던 ‘제니스 양복점’에 취직이 되어 모선기(2008년 작고) 회장님을 만나 남들은 10년 걸려 배울 일을 5년 만에 배워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이 분은 양복업계에서 다 알아주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소공동에서 유명한 ‘이성우양복점’ 이성우 사장님이십니다. 그 당시 세계대회 메달리스트 12명이 모두 이분한테 기술을 배웠습니다. 당뇨병으로 일찍 돌아 가셨는데 제자들이 이성우 선생을 기리는 ‘이성우 양복 문화상’을 만들었습니다. 메달리스트들이 3,800만원의 기금을 만들어 매년 양복의 날(2월 21일)에 한 명씩 협회에서 선발하여 금 한 냥을 부상으로 주고 있습니다. 맞춤양복 기술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견습공으로 10~15년을 보내야 합니다. 모든 기술이 금방 되는 게 아닌데 너무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재단사가 되려고 합니다. 재단사는 체촌(몸에 사이즈를 재는 것), 패턴(본을 뜨는 것), 재단, 봉재 등 전체과정을 관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봉제는 안하고 재단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 재단사 수입은 어떤가요?
“여자 옷은 철마다 바뀌지만 남자 옷은 10년 이상 입고 고쳐 달라고 합니다. 단골손님인데 안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앙드레김도 양복 기술자 출신이지만 양장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나도 양장을 하고 싶었으나 양복 금메달 출신이기 때문에 못 했습니다.”
-대한민국양복명장이 되면 어떤 정부에서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대한민국양복명장은 10명 있는데 이중 5명 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명장이 되면 2,000만원의 일시장려금과 동일 직종에 계속 종사하게 되면 매년 ‘계속 종사 장려금’을 받습니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양복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없어 앞으로 영국으로 양복 맞추러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양복기술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매뉴얼이 없어 외국원서를 번역해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학에 양복을 전문하는 학과가 없습니다. 전문학교를 만들어 양복기능을 전수 하고 중저가 브랜드 양복을 만들고 싶습니다.”
백운현 명장은 가난 때문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15세 때부터 봉제공으로 나서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있다. 20년이 넘게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엔 2시간씩 안양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양복기술을 가르친다. 교육시간이 부족한 재소자를 위해 CD를 만들어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천성이 장삿속과는 거리가 멀다는 그의 아내 말대로 돈보다는 사람을, 그리고 재능을 먼저 생각하는 그같은 사람이 있어서 이 사회가 더 든든한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