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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明匠)을 찾아서 ...③ 서울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장 정명채 작성일 : 11-10-27 16:43
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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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대통령 관저에 그의 작품이 있다


명장(明匠)을 찾아서 ...③ 서울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장 정명채


시민리포터 이상무 | 2011.07.22





“나전칠기(螺鈿漆器)는 한문으로 소라 나(螺), 장식 전(鈿), 옻칠 칠(漆), 그릇 기(器)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조개껍질로 장식을 해서 옻칠하여 만든 기물입니다. 옻은 습기와 온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능도 있어요. 고려시대엔 경전·경함에 옻칠을 해 방수·방충을 했습니다.”


정 명장은 칠기명장이면서 2004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받았다. 1999년 ‘대한민국 산업포장’을 수상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실시하는 국가검정자격시험문제 출제위원 및 심사위원, 전국 기능경기대회 문제출제위원 및 심사장을 맡고 있다. 나전명장은 무형문화재보다 넓은 개념으로 옛 기법뿐만 아니라 최신 기법으로도 표현 할 수 있는, 즉 양쪽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서울시 무형문화재에는 42개 종목에 기능 보유자는 48명이 있다고 한다.


정 명장이 만든 보석함, 서류함 등 나전 작품은 대통령의 외국 방문 시 국빈 선물로 많이 쓰인다고 하는데...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하기에 앞서 청와대로부터 “나전칠기 병풍을 20일 만에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정씨는 고사했다고 했다. “국빈 선물로 나가는 선물을 정통기법으로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허락을 못한다”고 거절한 것이다. 정 명장은 옻칠로 제대로 된 나전 작품을 만들려면 두 달 이상 걸린다고 설명한다.


나전칠기를 만들기 위해 자개, 칠, 디자인, 장석(붙이는 것) 4가지 기술이 필요한데 4가지 기술을 다 구사하는 장인은 전국에 4~5명 정도뿐이라고 한다. 그는 은평구 역촌동 작업장에서 1년에 3~4개의 나전 작품을 만든다. 2층장의 경우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도 있다고.


스승님은 ‘네가 해 봐’ 선문답만


‘서울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은 북촌 투어 첫 번째 코스로 정해져있어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이날은 비가 와서 그런지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 재동 북촌마을의 한 전통한옥을 리모델링한 교육전시장에서는 서울에 사는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의 작품 제작 과정을 시연하고, 일반인들에게 주제별로 주 2~3회 강좌도 하고 있다. 지난 7월 14일 비오는 오후, 정명채(62) 명장을 북촌 입구에 있는 서울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에서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이틀 후 은평구 역촌동 그의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 옻으로 만든 나전칠기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습니까?
 “썩는 것을 방지해 주며 벌레도 생기지 않습니다. 금속, 사기, 목재, 섬유 할 것 없이 다 붙일 수 있는 접착력이 있죠. 1988년 경남 다호리 고분출토유물에서 보듯이 BC 2세기경 고분에서 칠기 안에 곡물과 나무가 원형 그대로 보전된 것을 발견 한 적이 있어요. 땅속엔 습기와 산이 있기 마련인데 2000년 동안 온전하게 상하지 않은 유물만 보더라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옻 액이 피부에 닿으면 알레르기성 피부염을 일으키지만 약재료로 쓰이며 몸을 따뜻하게 하고 살균, 항암효과도 있다고 한방에서는 말합니다.”


- 옻은 어디서 많이 생산되나요?
 “우리나라는 원주와 태천(함경북도) 옻이 우수 합니다. 충북 옥천도 옻나무 특구지역으로 정해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나오는 정도로 아주 조금씩밖에 나오지 않아요. 옻나무는 6~7년 자라야 되는데 7월에서 8월 중 채취하는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3.75㎏ 기준으로 래커는 1만원인데 옻은 230~260만원으로 아주 고가입니다.”


- 어떤 계기로 나전칠기를 배우게 되었는지요?
“고등학생 때 서울 정릉동 신흥사 근처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가 옆집 공방에서 통영 사람이 나전 일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옻칠한 시커먼 바탕에 자개문양이 반짝이는 빛에 반했습니다. 그 집에서 박정대 선생을 만나 나전칠기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나전칠기 명인은 조선조 말기부터 김기주, 김진갑, 김봉룡, 김태희 선생 등으로 이어져 왔는데 김태희 선생에게 기술 지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 스승님은 한 번에 가르쳐 주지 않고 선문답만 하셨다고요?
“제가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했어요. 방법을 물어 보면 스승님은 늘 ‘네가 해 봐’라는 대답뿐 이었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셔서 조각도나 공기구가 놓였던 자리에 없으면 ‘이거 만졌지?’하면서 머리를 쥐어박았어요. 어떻게 하면 잘 될 거라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어요. 그게 제 욕구를 더욱 부채질 한 것 같아요.”


- 왜 통영이 나전칠기로 유명합니까?
“습도가 73%, 온도 23℃ 정도가 칠기 건조에 필수 조건입니다. 통영은 추워도 영하로 안 내려가 기후조건이 좋고, 청정수역인 한려수도에서는 색이 영롱한 양질의 무지갯빛 전복 패(貝)를 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전칠기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나전칠기를 배우려면 재료학이나 디자인교육도 필요합니까?
“나전은 옻칠한 나무에 자개로 무늬를 놓는 작업이기 때문에 재료학과 디자인을 공부하면 도움이 됩니다. 나전은 자개를 붙이는 기법에 따라 자개를 실톱으로 오려서 붙이는 ‘주름질 기법’, 선으로 잘라 상사로 썰어서 붙이는 ‘끊음질 기법’ 등이 있습니다.”


- 43년간 나전칠기만을 위해 외길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때 보람을 느낍니까?
“대학에서 강의 할 때나 국빈 선물로 선택되어 각국 대통령 관저에서 제가 만든 나전칠기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보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 해외 전시를 많이 하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전시는?
 “1987년에 88올림픽을 대비하여 문화관광부 주관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중남미 순회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쉬웠을 때는 2000년 한국 방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이탈리아대사관 문화관에서 열린 대사부부 초청 만찬에서 동남아국가 대사가 우리의 나전칠기와 전통공예품을 보고 중국 것인지 일본 것인지 물어볼 때였습니다.”


- 첫 작품을 사 간 사람을 기억합니까?
“어떤 회사 CEO가 가구 및 공예품 일습(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또는 그 전부)을 주문했고요, 첫 외국인은 일본 야나이 대사가 이임하면서 구절판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농사꾼이었으나 손재주가 많아 농기구, 가구, 목공예 등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 났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학교에선 일본어를 집에선 국어를 배우셨다고 해요. 신식교육은 못 받았지만 머리가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45세 때 천수경을 외우셨죠. 돌아가실 때 관에 천수경을 함께 묻어드렸지요.”


-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만들고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손재주가 있어 따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도, 군 지역경시대회에서 서예상, 미술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꿈은 세부적인 것 없이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실업계(기계과)고등학교에 간 것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집안사정 때문이었습니다. 형님이 부도나기 전까지 큰 고생 없이 살다가 중학교 졸업 후 어려워졌습니다. 격동기였죠. 채무를 정리하다보니 가세는 기울고 아버지는 병이 생겼으나 어머니의 정신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국내 유일의 칠예학과가 없어진다니...


- 명장이 되기까지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던데?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을 하고 스케치를 하고 디자인을 만들어 작품을 완성했을 때 물질로써 느낄 수 없는 희열이랄까, 뭐 그런 걸 느낍니다. 이것이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정신적 위안이 됐습니다.”


- 생활 철학은요?
“나중에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원칙과 신의를 중요시 합니다. 다수가 찬성하면 단체의 룰이기 때문에 따라 갑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스러운 일은?
“그때 그때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가슴에 담으려고 안 합니다. 친구가 어려웠을 때 사업에 도움 준 적이 있었죠. 인간적으로 도움을 줬는데 배신을 당했어요. 그때 내가 삶을 잘 못 살았나,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외숙의 중매로 만났습니다. 나와 비슷한 교육정도, 비슷한 환경에 양친이 살아계신 사람을 원했었지요.”


- 자제분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요?
 “아이들에게 따로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재주가 있어 사생대회 나가면 큰 상을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내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큰아이는 약국을 경영하고 둘째는 군 복무 중입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처럼 많이 낳을 걸 그랬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 하루 일과는?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주일은 강의와 협회에서 하는 시연교육을 하고 토요일엔 주로 경조사에 참석합니다. 운동은 별도로 하는 게 없고 동네에서 한 시간정도 산보합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역촌동 공방에서 작업합니다. 장시간 앉아서 작업하기 때문에 수시로 허리운동을 합니다.”


- 작품 활동하면서 생활하기 어려움은 없는지요?
 “중앙, 지방 무형문화재 전승 지원금은 월 60~130만 원, 전수교육 조교에게는 월 30~50만 원의 전승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무형문화재가 작품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일부 분야에 불과합니다. 무형문화재 전승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는 분야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향유하고 구매하는 '시장'이 생기지 않으면 무형문화재의 위기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전통문화가 제대로 전승되려면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문화정책을 펴야 할 것입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좋은 작품과 나전칠기를 현대 인테리어에 접목하여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어요. 국내 유일의 배재대 칠예과가 내년부터 없어진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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